잊어드리겠습니다. 3개월마다 다시 오세요
유럽의 연령확인 앱은 프라이버시를 지키려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증명을 서른 장씩 준다. 다 쓰면 여권을 다시 꺼내야 한다. 왜 그런지는 위원회의 명세가 직접 적고 있다.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나이를 확인해본 사람은 그 절차를 안다. 휴대폰 번호를 넣고, 문자를 받고, 인증번호를 옮겨 적는다. 몇 초면 끝난다.
그 몇 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확인이 끝났고, 문이 열렸다. 그걸로 충분하다.
유럽은 지금 그 절차를 다시 짓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고른 것과 반대편에서 짓는다.
확인은 하되 기억하지 않는 쪽이다.
서른 장
위원회는 2026년 4월 15일, 회원국이 가져다 쓸 수 있는 연령확인 앱을 공개했다. 각국이 자국어로 바꾸고 자국 앱에 넣을 수 있게 하되, 프라이버시 보호 기능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기술 명세를 열면 그 기능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온다.
“연령 증명은 한 번 쓰도록 설계되므로, 시스템은 증명을 묶음으로 발급할 수 있어야 한다. 각 묶음은 서른(30) 장으로 하기를 권고한다.”
앱은 증명서를 서른 장 받아 지갑에 넣어둔다. 사이트에 들어갈 때 한 장을 내밀고, 그 장은 버린다. 같은 장을 두 번 쓰면 두 사이트가 그것을 맞춰보고 “같은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른 장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여권을 다시 꺼낸다.
명세는 재발급 절차가 **“최소 3개월마다 이용자를 다시 식별할 것을 요구한다”**고 적는다. 증명서 자체도 발급일로부터 최대 3개월까지만 유효하다. 서른 장을 아껴 써도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처음이다.
덴마크·프랑스·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이 이 기술을 가져다 자국 앱을 준비하고 있다. 기술 포털은 자국 지갑에 통합하는 나라로 키프로스와 아일랜드를 더해 일곱을 적는다 — 세는 대상이 다르다. 그리고 위원회는 2026년 4월 시점에 앱이 **“기술적으로 준비됐고 곧 시민이 쓸 수 있다”**고 적었다. 아직 일반에 열린 물건은 아니다.
시계를 뭉갠다
같은 절에 이런 조항이 붙어 있다.
증명서 안에는 유효 기간 정보가 들어간다. 그런데 발급자는 그 시각을 일부러 뭉개야 한다. 시·분·초를 서른 장 모두에 같은 값으로 넣으라고 명세가 지시한다. 이유는 한 줄로 적혀 있다 — 시각 정보가 “연결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밀리초까지 정확한 발급 시각은 지문이 된다. 두 사이트가 그것을 맞춰보면 서른 장이 한 사람 것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시계를 흐린다.
이 조항이 이 설계의 성격을 보여준다.
망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연결될 수 있는 단서를 하나씩 찾아내 지워 넣어야 한다. 망각은 만들어 넣는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 넣는 것에는 값이 붙는다.
기억하지 않는 제도는 갱신해줄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의 전제를 놓는다.
만약 제도가 나를 기억하지 않도록 설계되는 것이 이미 기본값인 세계라면?
가정할 필요가 없다. 다섯 나라가 그 세계의 앱을 준비하고 있다.
그 세계에서 가장 먼저 깨지는 것은 프라이버시가 아니다. 갱신이다.
왜 서른 장이 떨어지면 여권을 다시 꺼내야 하는지, 명세가 직접 적는다.
“자동 재발급은 화이트라벨 앱 배포의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갱신 토큰으로 연령 증명을 재발급할 수 있다. 그러나 클레임에 생년월일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이용자는 클레임을 다시 계산하기 위해 등록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
인과가 세 단계다.
- 증명서에 생년월일을 넣지 않았다. 그게 이 설계의 요점이다. 나이가 열여덟을 넘었다는 사실만 나가고 생년월일은 남는다
- 그래서 갱신을 계산할 재료가 없다. 서버는 당신이 누구였는지 모르고, 알아서도 안 된다
- 그래서 당신이 처음부터 다시 한다
맥락을 지웠기 때문에 갱신이 안 된다.
이 문장은 해석이 아니다. 위원회의 명세가 기계적 인과로 적어놓은 것이다.
값은 어디로 청구되는가
기억은 편의의 다른 이름이다.
은행이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매번 신분증을 들고 가지 않는다. 병원이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지난번 검사를 다시 하지 않는다. 기억은 사생활을 위협하는 동시에, 반복을 면제해주는 장치다.
기억하지 않기로 하면 그 면제가 사라진다. 사라진 면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넘어간다.
연령확인 앱에서 그것은 이렇게 넘어간다 —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고, 앱을 열고, 기계 판독 영역을 비추고, 얼굴을 맞춰본다. 서른 번에 한 번, 또는 석 달에 한 번.
기관의 서버 비용으로 청구되지 않는다. 이용자의 손과 시간으로 청구된다.
그리고 이 청구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도착한다. 여권이 서랍에 있는 사람과, 갱신이 밀려 있는 사람과, 판독이 잘 안 되는 낡은 신분증을 가진 사람에게 같은 금액이 아니다. 1편에서 본 구조가 여기서도 나온다 — 여유가 있는 쪽이 덜 낸다.
왜 이 형태인가
이 충돌을 푸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2년 전에 이미 권고됐다.
2024년 6월 19일, 암호학자 열여섯 명이 위원회에 문서를 보냈다. 위원회 팀이 그해 6월 초 유럽 디지털 신분 지갑의 설계를 제시하고 의견을 요청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Camenisch, Lysyanskaya, Preneel, Troncoso, Hoepman 같은 이름들이 올라 있다.
권고는 BBS 계열 익명 자격증명이었다. 스무 해 넘게 학계가 분석해온 방식이고, 한 장으로 여러 번 증명하면서도 그 증명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서른 장을 받아둘 필요가 없다.
2026년, 위원회의 부속서 B가 다섯 방식을 놓고 평가한 표를 실었다. 요구사항은 넷이었다.
그중 둘만 보면 된다.
- Req02 — “영지식 증명 방식은 관련 학계의 동료 심사를 받아야 한다(SHALL)”
- Req03 — “영지식 증명 방식은 기존 인프라에 가능한 한 적은 변경을 요구해야 한다(SHALL)”. 근거란에 적힌 말은 **“빠른 시장 출시 전략”**이다
표의 판정은 이렇게 갈렸다.
| 방식 | Req02 동료 심사 | Req03 기존 인프라 마찰 |
|---|---|---|
| BBS+ | 통과 | 미달 |
| BBS+ (ECDSA 소지 증명 지원) | 통과 | 미달 |
| 페어링 없는 BBS+ | 통과 | 미달 |
| ECDSA 익명 자격증명 ← 선택됨 | 부분 | 통과 |
| Crescent | 부분 | 통과 |
BBS 계열 셋은 동료 심사 축에서 나란히 통과했고, 기존 인프라 마찰 축에서 나란히 미달했다. 선택된 것은 정확히 그 반대다.
부속서의 결론 문장은 *“기존 자격증명 형식 및 발급 흐름과의 호환성 덕분에 ECDSA 익명 자격증명이 가장 유망해 보인다”*이다.
그리고 같은 부속서가 선택된 방식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이 솔루션은 동료 심사를 받지 않았다.”
Req02는 동료 심사를 SHALL로 적었다. 선택된 방식은 그 항목에서 부분 판정을 받았다. 명세의 7장 제목은 **“실험적 기능”**이고, 그 장의 첫 문장은 영지식 증명이 다음 판본에 실험적 기능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적는다. 앱과 검증자에 대한 요구 수준도 SHALL이 아니라 SHOULD다. SHALL인 것은 묶음 발급과 한 번 쓰고 버리기 쪽이다.
여기서 멈춘다. 위원회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이 문서로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표에 적힌 축과 근거란에 적힌 말이 전부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값을 다르게 낸 곳, 아직 안 낸 곳
이 충돌에 다른 답을 낸 곳이 있다.
네덜란드의 Yivi는 Idemix라는 방식으로 여러 번 제시해도 연결되지 않는 자격증명을 실제로 굴려왔다. 라드바우트 대학에서 나와 Privacy by Design 재단이 운영한다. 네이메헌 시가 DigiD 옆에 이 로그인을 붙여뒀다. 다만 값을 안 낸 것은 아니다 — Yivi 자신의 문서가 Idemix의 한계를 적는다. 타원곡선 기반이 아니고, 하드웨어 바인딩을 지원하지 않는다. 휴대폰의 보안 칩에 열쇠를 묶어두는 그 기능이다. 그리고 2026년 6월 22일 Yivi 8.0은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 “Yivi가 OpenID를 말하는 IRMA 지갑이기를 그치고, IRMA도 말하는 자격증명 형식 중립 지갑이 되는 구조적 순간”. 유럽 지갑이 되려면 다른 형식이 정면으로 와야 한다. 규모는 2023년 11월 시점 십만 명대였다. 굴러간다는 증거이지, 보급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스위스는 값을 아직 안 냈다. 연방 e-ID 사무국은 2024년 12월 6일 블로그에서 불연결성을 정의하면서 그 한계를 같은 글에 적었다 —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정보가 평문으로 전달되는 한 내용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약속과 한계를 한 문서에 적어놓은 공식 문서는 드물다. 그런데 실제 기술 스택을 열면 SD-JWT VC와 ECDSA P-256이 있고 BBS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2026년 6월 30일, 도입이 연기됐다. 공식 표현은 **“이용자 데이터 보호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였고, 신뢰 인프라 가동은 2027년 상반기로 밀렸다. 사유가 불연결성이라고 적혀 있지는 않다.
한쪽은 값을 내고 규모를 얻지 못했고, 한쪽은 값을 정하지 못해 시간을 냈다.
예상되는 반론
“서른 장은 초기 파라미터일 뿐이다. 늘리면 된다.” 타당하다. 그리고 늘어날 것이다. 다만 늘리는 것은 충돌을 없애지 않고 주기를 늘린다. 그리고 3개월 상한은 장수와 별개로 걸려 있다. 삼백 장을 줘도 석 달 뒤에는 여권을 꺼낸다.
“영지식 증명이 들어갔으니 곧 해결된다.” 실제로 들어가고 있다. 안드로이드 앱은 2026년 1월 릴리스에서 *“영지식 증명 설정을 갖춘 EUDI Wallet Core 23.0-SNAPSHOT 통합”*을 올렸고, 지금도 Longfellow 회로를 불러 설정한다. iOS는 7월 10일 릴리스에서 같은 라이브러리를 붙였다. 약속만 하고 안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명세는 그것을 여전히 실험적 기능으로 분류하고, 부속서는 선택된 방식이 동료 심사를 받지 않았다고 적는다. 구현이 규범 문서를 앞서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규범으로 요구되는 것은 배치 발급 쪽이다 — 서른 장과 석 달은 그 요구에서 나온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위원회가 이 충돌을 이미 안다는 점이다. 같은 §6.2가 이렇게 잇는다 — “이런 이유로 갱신 토큰은 영지식 증명과 결합할 때에만 실용적이다.” 문제도 알고 해법의 방향도 안다. 언제 오는지가 적혀 있지 않을 뿐이다.
“Yivi가 하고 있으니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증명된 것 아닌가.” 절반만 맞다. Idemix는 하드웨어 바인딩을 포기하고 얻은 불연결성이다. 요건을 하나 내려놓으면 다른 하나가 선다. 어느 요건을 내려놓을지가 이 글이 보는 선택이다.
“연령 확인은 사소한 사례다. 신분 체계 전체로 확대하는 건 비약이다.” 확대하지 않는다. 방향은 반대다. 연령 확인은 증명할 것이 가장 적은 경우다. 열여덟을 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 가장 가벼운 경우에도 서른 장과 석 달이 붙는다면, 자격과 소득과 병력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무엇이 붙는가. 그것이 물음이다.
이미 매일 작동하고 있다
불연결성은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규모로 돌아가고 있다.
아이폰으로 웹사이트에 들어갔을 때 사람인지 확인하는 창이 뜨지 않은 적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Privacy Pass 계열의 구조로, Apple이 기기를 확인하고 Cloudflare나 Fastly가 표를 발급한다. 역할을 쪼개서 어느 쪽도 전체를 알지 못하게 하고, 블라인드 서명으로 표를 받은 시점과 쓴 시점을 연결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매끄럽게 도는 이유가 있다.
그 표가 증명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다. 누적할 맥락이 없으니 잊어도 잃을 것이 없다. 갱신할 것도 없다. 표가 떨어지면 조용히 새로 받으면 된다 — 서랍에서 여권을 꺼낼 일이 없다.
연령확인 앱이 증명하는 것도 “열여덟을 넘었다” 하나다. 거의 같은 크기다. 그런데 서른 장이 떨어지면 여권을 꺼낸다.
차이는 하나다. 하나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끝나지만, 다른 하나는 한 번은 진짜 신분을 봐야 한다. 그 한 번을 기억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그 한 번은 되풀이된다.
그러니 물음은 불연결성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다. 그건 좋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잊겠다고 정한 쪽과, 잊힌 값을 내는 쪽이 같지 않다.
지금 유럽에서는 그 값이 서랍 속 여권으로 청구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하드웨어 바인딩으로 냈고, 스위스는 아직 정하지 못해 일정으로 냈다.
세 곳이 서로 다른 통화로 같은 것을 사고 있다. 값이 정해지는 중이고, 청구서를 받는 쪽은 대체로 그 자리에 없다.
판단은 남겨둔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항목
이 글은 아래 항목이 확인되기 전까지 검증 완료로 표시되지 않는다.
- 파일럿 국가 수 — 위원회 요약 페이지는 자국 앱을 준비하는 다섯 나라를, 기술 포털은 자국 지갑에 통합하는 일곱 나라를 적는다. 세는 대상이 달라 본문에서 무엇을 세는 숫자인지 병기했다.
- 앱의 일반 공개 시점 — 위원회는 2026년 4월에 "기술적으로 준비됐고 곧 시민이 쓸 수 있다"고만 적었다. 실제 공개일은 확인하지 못했다.
- Longfellow를 안드로이드에 붙인 의존성이 정식 릴리스가 아니라 23.0-SNAPSHOT 버전이다. 정식화 시점은 확인하지 못했다.
- 스위스 e-ID 연기의 사유 범위 — 공식 문서는 "이용자 데이터 보호와 보안"까지만 적는다. 불연결성 때문이라고 쓰지 않았다.
- Yivi 사용자 수는 2023년 11월 시점 수치다. 2026년 현재 규모는 확인하지 못했다.
- 암호학자 권고 문서의 서명자 총수 — 저자 16명까지 확인했다.
출처
- EU 연령확인 기술 명세 v1.0.9 (운영·보안·제품·아키텍처)
- 부속서 B — 연령확인 솔루션의 영지식 증명
- EU 연령확인 청사진 기술 포털
- 연령확인 앱 릴리스 이력
- 위원회 —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연령확인 청사진
- 암호학자들의 EUDI ARF 피드백 (2024년 6월)
- ECDSA 기반 익명 자격증명 (Frigo·shelat, 2024)
- Longfellow 영지식 증명 라이브러리
- 스위스 연방 e-ID 블로그 — 불연결성이란 무엇인가 / 도입 연기
- 스위스 swiyu 신뢰 인프라 기술 스택
- Yivi 기술 개요 (Idemix 기반 불연결성)
- Yivi 8.0 — 암호 민첩성으로의 전환 (2026년 6월)
- Cloudflare Privacy Pass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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