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하나를 이미 현실이라 가정하고, 그것을 좌표 삼아 현재를 다시 읽는다.
하는 일
Arbitoria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맞히려 하지 않는다.
특정한 미래를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가정한 다음, 그 가정을 좌표로 놓고 지금을 다시 읽는다.
육하원칙의 “왜”는 보통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 여기서 묻는 “왜”는 다르다.
이 사건을 미래의 맥락에 놓았을 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는가?
순서
모든 글이 같은 다섯 단계를 지난다.
- 지금 벌어진 일을 한 줄로 놓는다.
- “만약 이것이 이미 현실이라면?” — 전제를 한 문장으로 고정한다.
- 그 세계에서 가장 먼저 깨지는 것 한두 개에 집중한다.
- 그 미래가 성립하려면 지금 무엇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지 역으로 추적한다.
-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사실 무엇의 시작인가?” — 현재로 돌아온다.
공상과 구분하는 기준
전제를 아무렇게나 세우면 그건 그냥 상상이다. 세 가지를 통과해야 쓴다.
- 궤적 연결성 — 지금 존재하는 어떤 정책·기술·세력의 연장선인가.
- 시스템적 파급력 — 행정·경제·교육·인프라 같은 여러 시스템에 동시에 걸리는가.
- 참조 가능한 선례 — 비교할 수 있는 역사적 또는 현재의 사례가 있는가.
주장하지 않는다
같은 사실을 다른 시간 좌표에 놓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는 그것을 보여줄 뿐, 결론을 대신 내리지 않는다.
의도를 추정해야 결론이 나오는 문장은 쓰지 않는다. 대신 구조만 진술한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무엇과 무엇이 정렬되어 있지 않은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쓰면 판단은 읽는 사람에게 남고, 글은 반박하기 어려워진다.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1부터 9까지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 이야기도, 성공 사례도, 논증도 이미 다 쓰여 있다. 1부터 9까지는 세상이 이미 주었다.
남은 창작의 영역은 그것을 어떻게 배열하느냐다.
그래서 “이거 다 아는 얘기 아닌가”라는 반응은 정확하다. 맞다. 원재료는 새롭지 않다. 우리가 내놓는 것은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새로운 배열이다.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끌어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바꾸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내 주변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성공이 전제가 아니다. 되면 좋지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달 규모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누가 읽는가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사람.
독자는 발견하는 대상이 아니라 정하는 대상이다. 정한 사람이 온다는 전제 위에 선다. 그 전제를 세우는 순간 “실패”는 성립하지 않는 단어가 된다.
이것 역시 위의 방법을 이 프로젝트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세 개의 언어
한국어·영어·프랑스어로 낸다. 번역이 아니다.
세 판본은 같은 원천 문서에서 각각 쓰인다. 한 판본이 다른 판본의 원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장도 비유도 시작하는 자리도 언어마다 다르다. 같아야 하는 것은 전제와 사실과 출처뿐이다.
이 원칙들이 실제로 어떻게 지켜지는지는 투명성에 적어 두었다.